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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G AN PRACTICE

공안독참

“공안 수행”에 대하여

– 숭산 선사와의 인터뷰 (미국에서 이루어짐)

질문자 : 공안독참이란 무엇입니까?  공안독참이 어떻게 선 수행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숭산 선사 : ‘공안’의 문자적 의미는 ‘공무에 관한 문안’, ‘공론에 의해 결정된 안건’, 또는 ‘공문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정부 문서의 사본을 만들 때, 원본과 사본을 붙여서 중앙에 관인(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원본과 사본의 진위 여부를 가려야 할 때, 두 개를 붙여보면 중앙에 찍힌 도장의 양 쪽의 절반 둘이 딱 들어맞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참선 수행 하는 선가에서 스승은 제자의 수행이나 깨달음을 점검하기 위해 공안 독참이라는 것을 합니다. ‘공안’은 위에서 설명한 의미이고, ‘독참’이란 홀로 (단 둘이서) 앉아 응한다는 의미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단 둘이서만 앉아서 문답을 하는 형식입니다. 보통 부처님이나 과거 선사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제자가 답하는 선문답의 형식을 공안 독참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 질문에 대해 스승의 통찰과 제자의 통찰이 마치 공문서 원본과 사본에 찍힌 도장의 양쪽 각 절반이 딱 들어 맞듯이 맞아 떨어지면,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한 치의 틈도 없이 통한 것으로 봅니다. 이를 일러 ‘이심전심’, 즉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고 합니다.

과거에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 선사들의 이야기를 잘 참구해 보는 것은 올바른 수행을 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그 마음을 이해(통찰)한다면 본인의 공안독참 수행이 옳게 간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사들이 옛 선사의 깨달음 이야기를 사용하여 선수행자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공안 수행법이고 스승과 단 둘이서 점검하는 것을 ‘공안독참’이라고 합니다..

원래부터 공안독참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 부처님 깨달음을 마음법으로 잇는 계보를 선맥이라 하는데, 불교 선맥상 7대 조사로 알려진 남악회양 선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장래 스승이 되는 6조 혜능 대사를 처음 찾아왔을 때 일입니다. 혜능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혜능이 다시 묻기를,

“여기에 온 것이 무엇인고?”

남악회양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선가의 첫 번째 공안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는 남악회양에게 큰 질문이 되었고 그 질문을 깨뜨리는데 8년이 걸렸답니다.

그 이전에도 불교 역사에는 후대에 선을 수행하는 승려들이 선문답 (공안독참)의 시초로 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 앉으셔서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커다란 질문들에 대해 참구하셨는데, 이도 공안 질문의 시초로 언급되곤 합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소림굴에서 오랫동안 면벽을 하는데, 한 구도자 (후에 달마대사 법을 이어 선맥상 2대 조사가 되는 혜가)가 찾아왔습니다. 추운 겨울 밖에서 오랜 시간 서 있는 자신에게 전혀 응대하지 않는 달마대사에게 혜가는 간절한 구도심의 표시로 자신의 팔을 잘라 보입니다. 이를 본 달마대사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제 마음이 몹시 불안정 합니다. 제 마음을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요.” 라고 혜가가 여쭙니다.

“네 마음을 내게 가져오라. 그러면 쉬게 해주겠다.” 달마대사가 답했습니다.

문득 당황하며, “찾으려 해도 마음이란게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라고 혜가가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문득 혜가가 깨달았답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은 선을 수행하는 수많은 승려들이 참구한 질문입니다.

달마대사와 혜가의 위 문답에서 많은 질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나)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등등, 이 모든 질문들은 공안이 되었고, 선 수행자들은 이 질문들을 참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문자 : 선사님께서는 우리 수행에 왜 공안을 사용하십니까?

숭산 선사 : 공안수행이 유별나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공안수행의 목적은 인생의 진리와 올바른 길을 찾고, 일상 생활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에 있습니다. 때때로 제자들에 대한 옛 선사들의 답변이 (논리에 맞는) 옳은 답변이 아닌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 때의 상황을 통찰하여 질문하는 수행자에게 올바른 행동과 삶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유명한 조주 선사는 한자로 ‘없다’라는 의미의 “무!”라고 답하셨는데, 사실 (불교 교리 논리상) 옳지 않은 답입니다. 하지만 조주 선사는 묻는 이들에게 올바른 인생을 가르치기 위해 ‘무’라는 답변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기 다른 예가 있습니다. 나부끼는 깃발을 보며, 깃발이 움직이는지 바람이 움직이는지에 대해 두 승려가 언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6조 혜능 대사가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요, 그대들 마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현상적으로) 옳지 않은 답변이지만, 올바른 인생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그렇게 답변하셨던 것입니다.

한번은 설법을 기다리는 수 많은 제자들 앞에서 아무 말씀이 없던 부처가 가만히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습니다. 참석한 1200명의 제자들 중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를 본 부처님께서 “내게 있는 진실하고 미묘한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인 이해력으로 보면)  옳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과 “나의 법을 너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을 통해 수행의 올바른 방향과 올바른 인생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안이라는 것은 수행의 올바른 방향,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선 수행자는 선사가 주는 ‘정답’이나 ‘오답’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공안을 수행하여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상황에 따라 대응할 수 있을지 연마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 공안 수행 없이는 맑고 깨어 있는 마음을 체득할 수 없는 것인가요?

숭산 선사 : (공안 수행) 없이도 가능합니다. 공안 수행은 여러가지 방편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미국 사람들은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중국 사람들은 젓가락만 사용하고, 한국 사람들은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하고, 인도 사람들은 그냥 손으로 먹쟎아요. 먹기 위해 다른 도구들을 사용하지만, 먹고 나면 다 배가 부르긴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런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 공안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게 아닌가요?

숭산 선사 : 뭔가를 (생각을) 만들어내면 문제에 부닥칩니다. ‘나의 견해’를 없애기 위해 공안을 사용하는 것이거든요. 견해가 사라지면 마음이 허공처럼 맑아지고, 허공처럼 맑은 마음은 그냥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이란 올바른 ‘조건 반사’와도 같아요. 다시 말해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올바르게 그리고 면밀하게 대응하는 것이죠. 그 순간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옳게 안다는 말입니다. 올바르게 수행을 하면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역할, 올바른 관계가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어떤 공안에 집착한다거나 혹은 ‘내가 공안 수행을 하고 있다.’라는 식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큰 문제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의 공안 혹은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수행하되 마음속에 아무 것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방향과 삶이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질문자 : 그러면 공안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숭산 선사 : 오래된 전통적인 공안들은 우리에게 대의심(큰 질문)을 던집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무엇이 마음인가?”, “이 순간이 무엇인가?”

올바른 공안 수행을 하려면 대의심(크게 의문하는 마음), 대신심(크게 믿는 마음), 대분심 (크게 분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대의심은 지적인 사고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느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만 가지 질문 모두가 결국 한 가지 질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한가지 질문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모를 뿐’을 이르는 것입니다. 무념, 즉 아무런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뜻하죠. ‘그저 할 뿐!’, 그것이 올바른 공안수행법 입니다.

그러나 만약 어느 공안 혹은 그러한 수행방법에 집착하면 큰 문제가 생길겁니다. 공안이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한데, 그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볼 수가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공안수행의 방향입니다. 그 방향이란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자리 입니다.

 

질문자 : 옛날 중국에서의 공안수행이 현대 미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숭산 선사 : 올바른 공안수행에 있어서 ‘미국 마음’이나 ‘옛날 중국 마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안 수행이란 생각 이전의 마음자리를 견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만 공안을 수행했습니다.

이제 우리 수행 가풍에서는 공안을 달리 활용합니다. 깨닫고 안깨닫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분명히 하고 일상생활을 지혜롭게 영위하기 위해서 공안을 수행합니다. 그러니 특정한 공안에 집착하지 말고, 순간순간 삶에서 분명하고 올바른 도리를 행하며 살아가기 위해 공안을 수행하십시오.

 

질문자 : 공안에 잘 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나를 밝혀서 단도직입적이고 옳은 답을 할 수 있습니까?

숭산 선사 : 다 놔버리세요! (방하착).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순간순간 ‘내 견해, 내 조건, 내 상황’ 같은 것들을 다 내려놔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옳은 답이 나타납니다. 바닥을 ‘탁!’ 친다거나, ‘할!’을 외친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테크닉 (방편)일 뿐입니다. 어떤 공안에 답을 할 때는 방편을 쓸 필요가 있고, 어떤 때는 필요 없을 때도 있습니다.

 

질문자 : 공안 수행을 하면 어떤 위험성이 따르진 않습니까?

숭산 선사 : 공안을 그저 ‘이해’하려고만 하면 커다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일종의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큰 아집 (‘나’에 집착)이 생겨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안에 대한 ‘좋은 답변’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공안 수행이 아닙니다.

 

질문자 : 십문관을 투과(통과)하려고 애쓰는 것이 일종의 경쟁심을 유발한다고 보시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부심을 가지게 하지는 않을까요?  공안을 풀어내려고 애쓰는 것이 목표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좀 위험한 방식이 되지는 않을까요?

숭산 선사 : 바로 ‘올바른 공안수행’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올바르게 (공안을) 수행하지 않으면 ‘나’라는 아상 (‘나’라는 생각)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 경쟁심이 생겨나게 되고, 또 자부심이 고개를 들게 됩니다. 공안을 옳게 ‘체득’하면 그러한 마음들이 절대 생겨나지 않습니다. 공안수행은 모든 종류의 (분석적인) 생각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 조건, 내 견해, 내 상황’에 대한 집착을 모두 내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마음은 지적이고 매우 분석적입니다. 그러한 분석적인 마음으로는 공안을 투과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공안수행이라는 것은 마음이 아주 단순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단순하면 ‘나’가 없습니다. 그러면 공안수행도 문제없습니다.

우리 공안수행 스타일(가풍)은 ‘공안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방식은 산에 들어가서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공안에 몰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방식은 공안수행을 통해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올바른 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뭔가를 할 때는 그저 하십시오. ‘그저 할 뿐’인 순간에는 ‘생각’도 없고, 주체와 객체도 사라지며, 안과 밖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 수행 방식에서는 올바른 공안수행, 올바른 삶, 올바른 방향의 세 가지가 모두 한 가지 것이 됩니다. 우리 일상생활을 분명하게 살면 공안수행은 문제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공안수행이 특별한게 아니죠.

일상생활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공안수행이 필요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공안수행이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그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옛날 공안, 새로운 공안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의 삶은 아주 분명한데, 다른 사람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올바르게 도리를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와 올바른 길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모릅니다. ‘분명한 삶, 진리, 올바른 길’ 세 가지가 면밀하게 서로 이어질 때, 그것이 바로 공안입니다. 그저 “내 삶은 분명하다”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비유컨데 항상 한 가지 음식만 먹게 되면 몸에 문제가 생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몸이 균형을 갖추고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다른 종류의 음식들이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질문자 : 선사님의 공안 가르침 시스템에 대해 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공안들에 대해서몇 가지 다른 ‘여여’ 종류를 말씀하시는데, 설명을 부탁합니다.

숭산 선사 : 네 가지 ‘여여’ 종류의 공안을 활용합니다.

  1. 무여 (無如) : 진공(참으로 비어있음), 원점(본점), 실체

→침묵, 적멸(완전히 고요해 아무 것도 없음)

(공안 예 : “무엇이 진공인가?”  “무엇이 적멸인가?”)

  1. 일여 (一如) : 할! (외마디 소리 지르기), 방! (한 방 때림), 탁! (방바닥을 침)

→원점(실체)에 대한 올바른 표출(보여줌)

(공안 예 : “부처가 꽃 한 송이를 들어올리자 마하가섭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1. 여여 (如如) : 진리, 실상

→원점(실체)의 있는 그대로의 작용

(공안 예 : “봄이 오니 풀이 저절로 자란다.”   “3x 3 = 9”  “부처가 무엇인가? – 마 서근”)

  1. 즉여 (卽如) : ‘그저 할 뿐’이 올바른 삶

→상황에 딱 들어맞는 한 작용(대응)

(공안 예 : “차나 한자 하게나”  “발우(그릇)를 씻게나”)

이렇게 네 종류의 공안을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의리적인 설명). 예를 들어 공안 독참에 들어갔는데, 스승이 컵과 펜을 앞에 놓고 “컵과 펜이 같은가, 다른가?” 라고 묻는다고 합시다. 각각의 네 가지 ‘여여’ 자리에서 아래와 같이 답할 수 있습니다.

무여 : (완전히 침묵) (‘오직 모를 뿐’인 마음)

일여 : ‘탁!’ (바닥을 한 번 친다.) 또는 “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여여 : “컵은 컵이고, 펜은 펜입니다” 라고 말한다.

즉여 : (컵을 들어 물을 마시고, 펜을 들어 쓴다) – 행동

따라서 ‘즉여’란 ‘그저 할 뿐’인 것이고, 그것이 올바른 기능이며 올바른 일상생활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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